헝가리 인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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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9년 8월, 소련의 지원을 받던 헝가리 사회주의자들은 헝가리 제2공화국을 무력화시키고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후신인 헝가리 인민 공화국(Magyar Népköztársaság)을 수립했다. 사회주의 정권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충실히 움직였다. 헝가리인들은 거듭된 외부의 간섭과 정부의 억압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소련의 통제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2. 역사
2.1. 탈소 정책
라코시 마차시에 뒤이어 사회주의 정권의 수장이 된 너지 임레(Nagy Imre)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을 기회로 헝가리에 자유화를 추진하였다. 너지 임레 자신이 친소파 공산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계속된 소련의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헝가리의 중립화와 개방화를 추진하게 된 것. 사실 흐루쇼프도 너지 임레의 개혁을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하려고 했으나[4] , 너지가 아예 소련의 세력권을 벗어나려고 하자, 애써 만들어 놓은 동유럽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이의 진압을 결심하게 된다. 시민들은 이에 반발해 소련의 통제와 사회주의 통치 전반에 반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니 바로 '''헝가리 혁명'''이다. 소련 정부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기갑부대를 보내어 무력으로 부다페스트를 점령해 버렸다. 시민들의 봉기는 물론 유혈진압되었다. 너지 임레는 반역혐의로 처형되었고[5] 이어 새로운 지도자로 소련의 비호를 얻은 카다르 야노시(Kádár János)가 집권하게 된다.
2.2. 구야시 공산주의
소련의 힘으로 집권했지만, 헝가리에는 다행스럽게도 카다르 야노시는 매우 실용적인 지도자였으며, 헝가리 국민들에게 소련의 앞잡이라는 비난과 경멸을 들으면서도 너지가 추진했던 개혁개방화를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스럽게 추진했다.''' 호르티 미클로시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의 적이다"라는 모토로 반대파에 극렬한 탄압을 가한 반면, 카다르는 "우리에 반대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리의 친구다"라는 모토로 반대파에 대한 탄압도 극히 자제했다. '구야시 공산주의'(Goulash communism)이라는 이름으로 유화 및 개방 정책을 펼쳐 국민들을 어느정도 달래는 데 성공했으며 니키타 흐루쇼프의 통치하에서 소련이 온건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헝가리는 조심스러운 경제적 '조정' 조치들을 취하고 정치적으로도 온건하고 완만한 정책들을 수행했다. 이러한 헝가리의 정책 조정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성장에 발판이 되어 주었다.'''[6]
물론 카다르의 경제개혁에는 서방에서 끌어온 외채가 큰 역할을 했고 이때문에 80년대 들어서 헝가리는 외채 압박에 시달리게 되지만[7] , 부다페스트는 그래도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에서는 상상도 못할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8]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집권 초기 부다페스트를 방문하여, 그 번화상을 보고 여기가 바로 소련의 미래다라고 이야기했을 정도. 그래서 당대 헝가리인들은 자국을 수용소에서 가장 좋은 막사(...)라고 불렀다. 다만 물가가 전반적으로 싸서 평균적인 구매력이 높은 것과는 별개로 임금수준이 전반적으로 낮기 때문에 월급은 에티오피아급인데 세금은 스웨덴급이라는 자조어린 농담이 헝가리에서 돌아다니기도 했다.[9] 정작 민주화 이후로 전체적인 물가수준[10] 이나 월세비가 너무 올랐기 때문에 차라리 공산정권이 그립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함정이지만(...)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었는데, 헝가리는 1970년대의 경색된 상황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개혁을 지속했다. 티도 안나는 개혁이었기 때문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도 헝가리에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1956년을 경험한 헝가리 정부는 모든 개혁에 조심스러웠고 소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했다. 카다르 야노시는 동유럽권이 붕괴하던 1988년 모든 지위를 내놓고 사임하지만, 이듬해 일어난 동유럽 혁명 이후 헝가리에 민주정권이 들어서면서 점점 그의 독자적인 개혁개방정책이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하지만 2006년 극우세력에 의해 그의 묘지[* 보면 알겠지만 '''예상 외로 소박하다(...)'''. 사실 중앙유럽의 공산권 지도자들은 타 공산권과 달리 평범한 묘에 묻혔다.]는 훼손되었고, 아직도 그의 유골은 실종상태로 있다.
어쨌든 당시 헝가리가 시행했던 경제개혁 정책은 나중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서도 참고점이 되면서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의의는 있다.
3. 문화
이 때 당시에 나온 만화인 유치커가 있다.
일련의 록 밴드들이 영미권의 펑크 운동에 자극받아 공산당 정부의 검열과 압박을 버텨가며 나름대로의 펑크 음악을 발전시킨 적이 있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Atilla Grandpierre의 Vágtázó Halottkémek이 있으며,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펑크 음악에 결합해 독특한 공연을 펼쳐 헝가리 청년들의 인기를 끌었다. 참고1 참고2
[1] 1956년까지는 이 국기를 사용했다.[image] 그 이후 현재의 국기로 바꿨다. [image] 본 문서는 현재의 헝가리와 구분하기 위해 정부기를 사용하였다.[2] 이 국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종교색이 강했기 때문에 인민공화국 시절 내내 가사 없이 곡으로만 연주되었다.[3] 국교는 없으나 가톨릭이 다수.[4] 그래서 동시기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부분적인) 자유화 정책을 폈던 폴란드에 소련군이 침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무우카는 외교정책 면에서는 WTO에 계속 잔류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기에 너지 임레와 다르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5] 이후 1988~89년 민주화 도중에 명예복권과 추도 및 이장식이 이루어졌다.[6] 여담으로 그래서 당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나라였다고 한다. 서구의 문화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대충 유신 긴급조치 이전의 한국 수준) 그래서인지 동유럽에서 팝음악 강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참고.[7] 다만 서방에서 외채를 끌여온 나라는 비단 헝가리뿐만은 아니었었고 이웃 나라들(사실 유고슬라비아가 원조격이긴 하다)에서 이를 따라해서 1970년대에 걸쳐 공장시설을 늘리고 내수를 진작하겠다시고 서방에서 자금을 대거 끌어들이다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이자율이 급증하고, 성장이 침체되면서 결국엔 1980년대에 제대로 탈이 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80년대 중반 들어서 큰 형님 국가라는 소련도 국방비 증가와 유가하락, 체르노빌 사건의 여파로 경기침체를 겪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 늘어난 빚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동구권의 공산체제가 생각 외로 허술하게 붕괴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8] 명목상으로는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가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삶의 질은 헝가리가 더 높았다.[9] 2000년대 이후의 쿠바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인데 1인당 GDP 수준은 중위권이지만 월급수준은 몹시 낮은 편이다. 그만큼 기본적인 물가가 몹시 싸고 치안이나 교육, 의료 수준은 중남미 기준으로 나름대로 괜찮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먹고 살기는 괜찮다는 평이지만 봉급 수준이 낮기 때문에 미국에서 잡일하는 처지라 해도 쿠바에서 일하는 것보다 봉급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다 보니 돈을 모으면 쿠바에서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보트피플이 성행하고 있는 것.[10] 1990년대 민영화 붐이나 인플레이션 등으로 물가가 많이 올라서 버는건 한국보다 많이 낮은데 체감 물가 수준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 물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같은 선진국에 비하면 물가는 아직도 많이 싼 축에 속하기는 하고, 사회복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공산주의의 영향이 남아있기 때문에 한국보다는 훨씬 더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시장소득을 넉넉하게 보충할 만큼 충분한 수준이 아니다. 또한 재정적자를 최대한으로 감축한답시고 부가가치세를 빡세게 올린 것도 크게 작용하는데 헝가리의 부가가치세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인데 무려 27%에 달한다. 북유럽 국가들도 21~25%대인 점이나 헝가리의 복지수준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인 것.